안녕하세요, 센베노 그리고 하이! 첫 번째 이야기: 몽골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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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1995 우리 가족은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다.  한국에 모국어인 한국어로 말할 때조차 나는 굉장히 소심해서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어려워했었다. 그런 내가, 번도 실생활에서 사용해 본적 없는 영어로 말도 해야 하고, 사람도 만나야 하며, 공부도 해야 했다. 나에게 닥친 현실은 더욱더 절망적이고 힘들었다.

이민 22년이 흘렀다. 사이 나는 잠시 한국으로 돌아가 일을 적도 있었고, 뒤로도 가끔 한국을 방문한다. 한국을 다시 찾으면서 어릴 적엔 그렇게 힘들었던 한국어로의 대화가 너무나 편하게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어떤 표현도 가능한 같았고, 한국인 끼리는, 뭔가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있었다.

현재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언어 때문에 힘들다. 그렇다고 이유 하나만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나는 혼자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모두들 나처럼 2외국어로 대화한다면, 나는 자신감을 갖게 되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감과 어처구니없는 핑곗거리가 나를 부추겼다. 나는 나만의 가설을 만들었다. 영어권 나라가 아닌 곳에서, 모두가 2외국어만 사용해야 한다면, 왠지 모두 동등한 위치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어리석은 가설로 나는 영어권 나라 중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찾기 시작했다.

와중에 랜드 아트 몽골리아360o (LAM360o)라는 단체에서 5 비엔날레에 참여할 작가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몽골은 내가 가리라곤 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 나라였다.

대지 아트라는 자체가 나에게 흥미로운 도전이었다. 게다가 여러 다른 나라의 작가들도 만나고 함께 작업하며 새로운 것을 배울 있는 좋은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영어권 나라라는 조건은 내가 찾던 완벽한 기회의 장소란 생각이 들었다.

2018 3

3 어느 새벽, 이메일 알림이 울렸다. 반쯤은 여전히 감겨있는 눈으로 이메일을 열어보았다. 몽골에 대한 환상과 간절함이 너무 커서 였을까? LAM360o으로부터 참여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이메일이었다.

내가 지원한 해외지역 중에서 받은 공식 초대였다. 행복해야 순간 내가 뱉은 첫마디는 ‘What the XXXX!’ 이었다. 내가 꿈꾸던 환상은 사라지고, 머릿속은 온통 오지 생활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화장실은 어떻게 가지?

달은 밑도 끝도 없는 환상과 기대로 보내고, 그다음엔 없는 공포와 스트레스의 시기가 오기도 했다. 그리고 또다시 설렘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나는 보통 여행 준비를 때면,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를 참고한다. 한국어가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거리와 정보가 정작 나한테 맞지 않을 때가 많다. 언어적 공통점과 편리성은 분명히 있지만, 이민자로써 그들과는 다른 정서를 가지게 것도 사실이다. 한국인도 아닌, 뉴질랜드인도 아닌 모호한 정체성을 가지게 것이다.

여행 정보를 위해 동안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를 기웃거렸다. 내가 참고할 만한, 비슷한 성향의 여행 정보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생각지 못했던 한국인의 관점에서 나오는 여행의 목적, 가치들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는 것이 흥미로웠다.

보통 한국 직장인의 공식 휴가는 뉴질랜드보다 짧다. 게다가 한국의 직장문화는 공식적인 휴가를 쓰기에도 쉽지 않은 구조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휴가는 짧은 기간에 효율적으로 많은 것을 있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

내가 LAM360o 공식 일정 진행한 몽골 사막 투어 , 가장 아침 일찍 움직이는 그룹은 한국인 그룹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동시에 자연에서의 여유로움도 만끽하길 원하다. 소셜네트워크를 방문할 가장 많이  내걸려 있던 여행 동행의 기본 공통 컨셉은 고요한 밤하늘의 별을 함께 바라보며 자연을 즐기길 원하는 사람을 찾는 글이었다. 그런 글들을 보면 나는 생각했다. ‘내가 여기, 파히하에서 매일 하는 일상이잖아라고.

Ulaanbaatar City. Photo by Sena Park

Ulaanbaatar City. Photo by Sena Park

2018 7 22

21 오전 8시쯤 뉴질랜드를 떠나 시드니, 그리고 베이징을 경유하여 22 오전 4 30분에 드디어 몽골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생각보다 작았다.

출입국 관리소를 나와 공항 로비에서 이름을 찾아보았다. 한데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하려던 순간, 다행히도 돌고르 (LAM360o CEO)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국말로 말을 하는 돌고르가 바로 5미터 앞에서 손을 흔들며 서있었다. 옆에 건장한 남자도 함께였다. 우리는 서로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반갑게 포옹을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옆에 같이 걷던 남자도 한국말을 하며 우리의 대화에 합류했다. 이거 도대체 뭐지? 어떻게 모두 한국어를 하지? 그렇게 대화에 합류한 남자는 우리와 함께 몽골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작가 명이었다. 그는 그를바다 부르라고 했다. 바다는 한국의 대학에서 2년을 공부했다고 한다. 어떻게, 겨우 2년을 공부했는데, 한국어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있지? 나는 여전히 영어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한국과 몽골을 비교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중간중간 내가 뉴질랜드에 대한 이야기로 바꿔보기도 했지만, 대화를 방해할 ,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 뉴질랜드는 잠시 잊고, 그냥 한국인처럼 행동하자!

숙소에 도착해서 우리 셋은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대화를 바다는 몽골어로 카운터 직원에게 전달했다. 잠시 각자 시간의 휴식을 가진 바다가 환전 여러 가지 소소한 일들을 도와주기 위해 나의 숙소로 다시 찾아와 주었다. 나는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바다의 부인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바다의 부인이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사실 그녀는 한국말을 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한국말로 첫인사를 건넸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너무나 놀랐다. 거기에 한국도 이미 여러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내가LAM360o 비엔날레를 위해 조사를 당시, 아직까지 뉴질랜드 아티스트는 번도 참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한국인은 전에 참여한 적이 있지만, 올해는 이외에 다른 한국 작가는 없다. 나는 뉴질랜드인으로, 처음 참가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뉴질랜드의 문화도 알리며, 유니크한 뉴질랜드인 아티스트로써 어느 정도의 장점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내가 계속 한국말을 하면서 뉴질랜드에 대한 얘기보다는 한국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리라곤 예상치 못했었다.

뉴질랜드에서 몽골과의 관계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대사관도 없이 오직 영사관만 있다. 게다가 뉴질랜드에서의 몽골 비자 가격은 한국에 비해 10  가까이 비쌌다.

반면 몽골은 한국과 너무 가까운 나라 같았다. 솔직히 몽골에 대한 지식은 한국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배운 전부였다. 외엔, 몽골 사람을 본적도, 주변 사람을 통해 몽골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들은 적도 없다. 내가 한국을 떠난 갑자기 가까워진 건가? 하지만, 몽골은 한국 여행객의 관점에서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나라 하나로 보였다.

그런데, 몽골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한국은 정말 가까운 이웃나라 같았다. 몽골에서 한국 문화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솔직히 약간은 한쪽으로 치우친 관계 같은 느낌이었다. 바다의 에피소드를 들어보면, 바다가 처음 한국에 갔을 한국 친구들이 바다에게 콜라는 건네주며, 콜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캔을 따는 방법에 마시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때 바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심지어 사람고기를 먹는 냐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이런 얘기들이 아직은 한국인에게 몽골은 알려지지 않은 보인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Hello 이외에 영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나는 한국말로 얘기하고 내가 뉴질랜드에서 왔다는 것은 전혀 의식할 없는 하루를 보냈다. 반면,  나는 한국인으로서 환대를 받은 느낌이다. 보통 나의 국적이 크게 상관없는 일반적인 여행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정체성, 언어의 스트레스로 택했던 몽골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혼합 정체성을 상황에 따라 적절히 이용하며 즐겼다. 내가 가진 훌륭한 장점처럼 말이다. 나의 이중적 문화 정체성이 작업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Dawa’s place in

2018 7 23

오늘은 다와네 집을 방문하는 날이다. 다와는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몽골인이다. 그녀는 자신을 한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몽골인 유학생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녀를 통해, 몽골에 계신 그녀의 부모님댁에 방문하기로 미리 연락을 상태였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산했다. 버스 티켓 창구 작은 미니버스 대가 서있었다. 나는 버스 안에서 출발할 때까지 40분간을 앉아있었다.

버스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몽골인들이 지나가면서 내게 말을 시켰다. 내가 알기론, 한국인과 몽골은 같은 혈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아직도 이것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학설은 아니다. 어쨌든, 오늘날에는 생활습관, 문화 그리고 옷차림 등으로 한국인과 몽골인을 쉽게 구분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적 해석은 나에게는 적용되는 않았다. 나의 조상은 굉장히 강력한 몽골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던 분명하다. 심지어 내가 몽골인들과 함께 있을 때조차 사람들은 나를 몽골 인으로 착각하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것은 내가 몽골에 있는 동안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준멋까지는 1시간가량 걸렸다. 마지막 종점이었다. 다와는 사정이 있어서 오늘 나올 없었고 대신 니암카, 다와의 여동생이 하얀색 일본 자동차를 가지고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일일 가이드가 되어준 니암카는 의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 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만난 몽골인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번째 젊은 몽골인 이었다. 먼저 준멋의 거리를 걸어 다녀 보기로 했다. 나는 작은 시골 마을을 상상했기에 길에 좌판 같은 시장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콘크리트 건물들만이 있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건물의 사진을 찍어 댔다. 그때 놀랍게도 한국 식당 간판을 발견했다.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뉴질랜드라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뉴질랜드 내에서 한국 음식은 중국. 타이 그리고 인디언 음식에 비해 대중적이지는 못하다. 그런 한국 식당이 작은 마을까지 진출해 있다는 사실이 왠지 뭉클했다.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 다와는 몽골의 일상을 궁금해하는 한국인들에게 그녀의 부모님댁 몽골 가옥 게르에서 몽골에 대한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 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여전히 전통 가옥에서 살고 계셨다. 반면 나는 전통 가옥의 생활보다는 샤머니즘과 무속 신앙, 그리고 티베트의 영향을 받은 불교문화에 관심이 있었다. 불교 관련 건물들은 공산주의 시절 대부분 무력에 의해 사라졌다. 그런데 다와네 동네 근처에 Mañjuśrī  수도원의 터가 남아있는 유명한 곳이 있다고 해서 다와네 시골 체험 대신 사원 투어를 해주길 부탁했다. 사실 울란바타 시티는 내가 생각했던몽골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기에,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간다는 자체가 굉장히 기대되었다. 광활한 대지, 그리고 끝없는 길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다.

니암카가 운전을 하는 동안, 나는 창밖 풍경을 연신 찍어대느라 바빴다. 평화로운 대지처럼, 가축들조차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 마을 타운에서 점점 멀어질 때쯤 포장도로는 끝나고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올해 예상치 못하게 내린 많은 폭우로 길은 더욱더 좋지 않았다. 여기저기 웅덩이로 엄청나게 울퉁불퉁한 길이었다. 나라면 절대 운전할 없는 길처럼 보였다. 나는 그냥 걸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걷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몽골은 정말 넓다) 그런 길을 니암카는 놀라운 솜씨로 능숙하게 움직였다. 그것도 사륜구동도 아닌데 말이다. 정말 순간 그녀를 존경하지 않을 없었다.

드디어, 우리는 수도원에 도착했다. 주차장 근처에는 작은 스낵과 기념품을 파는 매장이 있었다. 뒤로 넓고 푸른 초원과 바위들이 보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물소리도 들렸다. 작은 시냇물이었다. 시냇물 넘어 대지는 점점 높아졌고, 언덕들이 층층이 보였다. 나는 사실 몽골을 굉장히 납작하고 편평한, 모레가 날리는 땅으로 상상했었다. 그러나 지금 순간 나는 몽골이 아닌 작은 유럽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몽골에 있는 동안 나는 몽골은 아시아보다는 유럽 쪽에 가깝게 느껴졌다. 언덕을 오르니 폐허가 수도원들의 흔적들이 나타났다.

Mañjuśrī Monastery, located 15km to the south of Ulaanbaatar. Photo by Sena Park

중앙에는 새롭게 지어진 사원 하나가 있었다. 뮤지엄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었다. 올라가니, 나이 드신 어른께서 나오셨다. 이곳의 관리인 이자 가이드였다. 나에서 손짓으로 내가 걸어가야 방향을 알려주시고선 중앙 뮤지엄 건물의 입구를 가리켰다. 아마도 그곳에서 만나자고 하시는 같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도착할 때까지  앞에서 기다리셨다.

뮤지엄 건물은 이층으로 건물로 어두운 건물 안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빛을 밝혀주고 있었다. 많은 장식품, 그리고 당시의 생활용품, 그리고 사진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1990 이후 건물만 새로 지었다고 한다.

가이드 할아버지와 나는 바디랭귀지와 아주 짧고 간단한 단어들로 소통했다. 그래도 모두 알아듣고 연신 웃어댔다. 할아버지는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해 주셨고, 역시 알아듣기 위해 집중했다. 바디 랭귀지로 소통하는 유쾌한 대화가 이어졌다.

투어 중간 즈음, 몽골 관광객들이 들어왔다. 갑자기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지시며 굉장히 빠른 속도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순간 할아버지가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전달해 주시려고 하는 듯했다.

잠시 후에야 할아버지는 내가 아직 옆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신 듯하다. 갑자기 멋쩍게 웃으시며, 다른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시고 돌아오셨다. 순간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나에 대해 언급하신 듯하다. 할아버지는 끝까지 가이드를 진행해 주셨다. 소통마저 쉽지 않았던 명의 외국 관광객을 위해 수고해 주신 할아버지께 너무나 감사드리고, 기억 속에 남길 사진 컷을 부탁드렸다.

수도원 투어를 마치고, 니암카와 나는 그녀의 부모님 댁으로 출발했다. 버스를 내렸던 타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도, 주변은 갑자기 정말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처럼 보였다. 4개의 게르가 보였다. 모두 가족과 친척들이 머물 있다고 했다. 니암카의 어머니와 어린 여자아이가 똥을 말리고 있었다. 말린 똥들은 석탄처럼 쓰인다고 했다. 니암카는 나를 다른 한국인 게스트들이 머물고 있는 게르에 데려다주고선 가족들이 모여있는 게르로 들어갔다.

한국인 게스트들이 머무는 게르 안에는 명의 남자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한국어로 자유로운 대화를 하는 것으로 보아 모두 한국인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중 남자는 다와와 니암카의 오빠였다. 그는 한국에서 년간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내가 몽골에 있는 것이 맞는지 다시 한번 의문이 들었다.

다와의 가족 게르 방문 코스는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기호에 맞춰 전통 가옥 게르에 머물며, 말을 마음껏 타고, 별을 바라보며, 현지인 음식을 제공받는 코스이다. 나는 사실 현지인들과 얘기하며 몽골인의 문화를 느끼고 싶었지만, 한국인이 모여 그룹이 형성되는 순간, 다와네 가족들은 우리와 굳이 말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점심때가 되니, 몽골의 전통 국수를 내어 왔다. 옆에는 한국 김치와 칠리소스까지 있었다. 식사가 끝난 전통 요거트와 전통차, 수테 차를 내어 오셨다. 먹기 쉬었던 요거트와는 달리 차는 약간 이상한 맛이었다. 우유 같으면서 고깃국 같은 맛이었다. 사실 차는 끓인 우유에 가루를 섞어 끓이다가 소금으로 간을 내어 마시는 차다.

다와네 가족은 모두 게르에 모여있었다. 그쪽으로 가보았다. 음식을 만들고 계셨다. 몽골 전통 바베큐 허르헉이었다. 맛있었다. 둥근 볼에 담긴 고기를 모두 맨손으로 찢어 먹었다. 몽골은 물이 굉장히 귀하다. 고기를 건네주던 남자는 손으로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 고기를 작게 찢어 건넸다. 나는 굉장히 음식 위생에 유별난 편인데, 몽골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는 그런 나를 버렸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없다는 알았다. 손으로 건네온 고기를 나는 모두 받아먹었다. 여전히 아주 맛이 좋았다.

드디어 몽골의 일반 화장실을 체험할 시간이 왔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모두 화장실이야~’ 말로만 들었던 누군가의 경험을 내가 직접 하게 되었다. 주위는 모두 화장실로 사용가능 하다. 주변에는 많은 휴지들이 마치 꽃처럼 널려있었다. 몽골의 땅은 신기한 것이 굉장히 편평한 것처럼 보이는 곳도 사실은 작은 차이로 경사가 굴곡이 있는 땅이다. 그래서 조금만 걸어서 나가면,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아직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아이도 같이 가자며, 좋은 장소를 찾아 함께 걸었다. 게르에서 조금 멀어지고, 아이의 요구에 따라, 우리는 서로가 보이지 않도록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샤워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니암카의 오빠는 내게 내가 전혀 예상치 않았던 답을 했다. 시내에 있는 아파트에서 샤워를 한다고 한다. 몽골은 도시화가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고, 많은 이들이 도시의 편안한 삶을 위해 몰려들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유목생활을 그리워하며, 여름이면 초원에 게르를 짓고 여름 별장처럼 한철을 지내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게르는 생각보다 텐트처럼 만들기 쉽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이러한 급격한 도시화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한다. 도시의 경쟁 사회에 익숙지 않은 유목민들은 힘든 도시생활에서 견디지 못하고 낙오되어 노숙자가 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커져가는 사회적 이슈인 것이다.

오후 5시쯤 나는 다른 한국인 관광객과 다와네 집을 나왔다. 울라바타에 도착하니 퇴근시간으로 길이 막혀 있었다. 그중 어디에도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몽골 택시 이용하기로 했다. 몽골 택시란? 우버의 기능과 비슷하다. 단지 사인도 어떤 시스템도 없이 앱도 필요 없는 그런 몽골 만의 교통 방식이다. 안쪽에서 손을 들고 서있으면, 일반 승용차가 멈춰 서고 행선지를 말해 의견이 맞으면, 차에 동승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요금을 지불하고 내리면 . 불법이지만 몽골에선 일반적인 교통수단으로, 아주 간단한듯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교통수단이기에 솔로 여행객이나 여자 여행객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나는 남학생과 함께 몽골 택시를 타고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나중에서야 호텔 외엔 정식 택시를 잡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Suutei tsai being prepared inside a traditional ger. Photo by Sena Park

Suutei tsai being prepared inside a traditional ger. Photo by Sena Park

2018 7 24

오전 10, 오늘은 바다와 주르케 커플과 함께 몽골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로 했다. 시티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타운처럼 개의 작업 동이 모여있었다. 먼저 우리는 몽골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몽골 아티스트, 오드마를 만나기 위해 세라믹 작업실로 갔다. 오드마는 우리를 자신의 작업실로 데려가 그녀가 직접 만든 찻잔에 차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국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거의 매년 한국을 방문하고 이미 여러 번의 전시와 레지던스를 경험했다고 한다. 그녀는 나보다 한국미술과 작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나는 4 가족 행사차 한국에 방문, 개인적인 친구를 만난 일이 가장 최근에 한국방문이다.  게다가  나는 한국의 미술계와는 전혀 교류가 없기에, 괜히 한국미술에 대해 말하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이곳 작가 스튜디오 방문을 끝내고, 나는 바다와 주르케의 작업실로 가보기로 했다. 그들의 작업실은 시티에서 조금 곳에 있었는데, 울란바타 지역이긴 하지만 외곽이다 보니 그곳의 풍경은 시티 중심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주변에 나무 상점, 그리고 철물점 작가에게 필요한 재료들을 파는 곳들이 인접해 있었다.

바다의 작업실은 2층으로 건물로 1층은 전시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한때는 50명에 가까운 작가들이 있었으나 올해 너무 많이 내린 비로 물이 들어 전기가 끊기면서 많은 작가들이 떠났다고 한다. 언제 고쳐질지 모르는 전기가 끊긴 상황에서 그들은 시간 동안 작업을 하고 있다.

바다와 주르케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한편에서 몽골 여행기를 썼다. 주르케는 집중력이 대단한 같았다. 앞선 스튜디오 타운에서 만났던 주르케의 스승도 그가 아끼는 제자 명이라며 그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집중력이 굉장히 약하다. 집중해서 작업을 하는 시간보다 충전을 위한 휴식 시간이 편이다. 나는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주변지역을 구경해 보기로 했다.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지나갔던 나무 시장이 보였다. 준비된 나무 상품 진열 앞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관심 있게 나무를 살펴보고 있으면, 그들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러면 나는 아무 없이 손으로 나무를 가리키며, 핸드폰 계산기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내가 외국인이란 상인들은 계산기에 가격을 눌러주었다. 소통 완료! 나무 구입의 흥정이 끝나면, 손님들은 차를 상점 앞에 세우고 바로 싣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가게 길은 일반 시장의 골목길 보다 넓었다.

바다와 주르케의 작업실로 돌아왔다. 어둑해진 작업실에서 주르케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와 바다는 그녀가 작업을 마칠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Writing in Bada and Jurke's studio. Photo by Sena Park

Writing in Bada and Jurke’s studio. Photo by Sena Park

2018 7 25

나는 오늘 몽골 내셔널 뮤지엄을 방문했다. 몽골의 역사는 굉장히 길다. 작은 규모의 뮤지엄에는 석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의 역사 시간에 몽골과 중국에 관한 옛날 역사도 배웠었다. 나라 모두 우리나라 역사와 자주 연관 지어지기 때문이다. 칭기즈칸 시대의 웅장했던 역사. 러시아는 몽골에게 지배당하기도 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사에서 몽골은 구소련의 권력 아래에 1980년대까지 공산주의의 시대를 맞게 된다. 이제서야 몽골이 어째서 유럽에 가까운 문화적 느낌이 드는지 이유를 같았다. 몽골에서 러시아 문화의 영향을 찾기란 굉장히 쉬웠다. 사실 처음엔 몽골과 러시아가 인접해 있기에 생긴 단순한 지리적 영향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론, 구세대와 중간 세대까지는 정규 수업 과목으로 러시아어를 배워 러시아어 안다고 한다. 지금 젊은 세대는 대신 영어를 배운다고 한다. 불행히도, 구소련 시대에 몽골 고유의 문자를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여전히 고유의 언어로 대화하고 있지만, 문자는 러시아 문자를 빌려 쓰고 있다. 고유 문자도 여전히 존재는 하나 거의 상용되지 않고 있다. 나는 몽골어의 소리조차 러시아어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인들은 단지 문자만 빌려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뮤지엄을 둘러보면, 이상하게 영혼이 모두 빨린 항상 힘이 빠진다. 갑자기 배가 너무 고팠다. 근처의 샵에서 호쇼를 주문했다. 전병 안에 고기와 고기즙이 가득 담긴 몽골 튀김만두이다.  손바닥 크기의 호쇼가 4개나 나왔다. 겨우 반만 끝냈다.

저녁에는 바다네 저녁 초대를 받아 와인 병을 사들고 방문했다. 말고도 명의 작가가 초대되었는데, 명은 로날드, 그는 이번 몽골 비엔날레에 우리와 함께 참여하는 네덜란드에서 작가로 네덜란드에서부터 자동차로 이곳까지 왔다. 지난 6월에 시작한 그의 로드 트립은 여정 전체가LAM360° 프로젝트인 것이다. 그는 벌써 많은 재료와 자료들을 수집했다고 한다. 처음 그는 파트너와 함께 이곳으로 오고 싶었지만, 파트너가 거절했다고 한다. 로드 트립의 힘든 여정이 예상되기에 그녀의 거절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대신 남자 사진작가와 함께 했다. 그는 20 몽골을 방문한 적이 있어 이번 여행에서 찍은 작업으로 당시와 비교해가는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몽골 비엔날레를 진행할 장소에 대해 정보를 충분히 받지 못했다. 분명 몽골의 대자연 어디쯤 것이라는 정도. 좋게 바다가 같은 장소에서 작년에 아티스트 레지던스를 했었기에 그때 기록을 보여주었다. 그가 보여준 사진 속의 풍경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척박한 언덕에 거친 바위들이 많이 있었다. 바다가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많은 풀이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우리가 직접 만난 우리의 장소는 그냥 푸르른 초원 자체였다.

몽골에서 머무는 동안 어려웠던 하나는 바로 몽골인들 이름을 발음하는 거였다. 바다의 진짜 이름은Soyolsaikhan Batsaikhan. 주르케 역시 정식 이름이 있지만,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결국 가르치기를 포기한 그녀는 바로 이날 저녁 간단한 별명을 만들었다. 이름이 바로 주르케이다. 주르케는 몽골말로심장이라는 뜻이다. 그녀의 조부모님께서 그녀가 어렸을 그녀를 부르던 이름이라고 한다. 별명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였는지 느껴졌다. 그리고 바다 말이, 요즘 이름의 트렌드는 200 유명인의 이름을 따오는 거라고 한다. 바다의 아들 이름은친군인데, 1860년대 살았던 장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했다. 뭔가 따라 하고 싶은 멋진 트렌드다.

몽골의 젊은 가족 문화를 있었던 즐거운 저녁이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통역 역할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영어로 말이다.

2018 7 26

나는 울란바타 근처의 국립 공원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이곳의 대중교통이 너무 복잡한 관계로 나는 그냥 포기했다. 그다음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블랙마켓이라고 불리는 나란툴 시장 방문이다. 여행객은 물론, 로컬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울란바타에서 가장 시장이다.

담벼락으로 둘러진 시장 안은 바깥과는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정말 너무나 , 쇼퍼의 천국이었다.  마치 미로 같았다. 만약 내가 하루 만에 쇼핑을 끝내야 했다면, 당황스러웠을 법한 크기였다. 나에게 이곳은 다시 방문하고 싶은 몽골 최애 장소가 되었다.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숙소는 몽골 비엔날레 주최 측에서 추천해 장소로 나처럼 공식 일정 전에 도착한 작가들이 대부분 이곳에 머물렀다. 돌고르는 오늘 저녁 홍콩에서 오는 새로운 아티스트와 인사도 함께 만나자고 했다.

시간에 맞춰 로비로 내려와보니, 이탈리아에서 미켈레, 그리고 덴마크에서 니에타가 있었다. 이곳에서 홍콩 작가는 만나지 못했다. 당황스럽게도 홍콩 작가의 짐이 비행기에 실려오지 않았고, 그녀의 어시스트 가방은 분실이 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나는 운이 좋았던 거구나 싶었다.

그리고 미켈레는 자신의 택배가 분실되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재료를 미리 택배로 보냈던 미켈레는 택배의 몽골 도착은 확인이 되었지만, 몽골에서 수령인과 얘기가 잘못되는 바람에 소포가 현재 분실되었다고 한다. 며칠 남지 않을 상황에서 다시 찾기란 힘들어 보였고, 모두 새로운 대체 재료의 구입을 권했다. 그는 몹시 힘들어 보였다. 나는 내일 함께 나란툴 시장에 가자고 제안했다.

An unexpected Korean restaurant in Zuunmod. Photo by Sena Park

An unexpected Korean restaurant in Zuunmod. Photo by Sena Park

2018 7 27

미켈레, 니에타, 그리고 바다와 주르케 커플과 함께 나란툴 시장으로 갔다. 바다는 기꺼이 우리의 가이드 통역사가 되어주었다. 물론 나는 영어 통역사가 되었다. 바다와 주르케의 도움 덕분에 모든 이루어졌다. 단지 미켈레의 주요 재료인, 골프공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몽골에서 골프는 굉장히 럭셔리한 스포츠이다. 시내에서는 쉽게 구할 수도 없었다. 바다는 여기서 가장 가까운 외곽 골프클럽까지 함께 주겠다고 했다.  나는 다른 지역을 있다는 사실이 조금 즐겁기도 했다.

푸른 산을 뒤로 한채 고급스럽게 서있는 빌딩들이  보였다. 마치 관리된 리조트 같았다. 바로 골프 클럽이었다. 빈부의 격차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골프클럽 하우스로 들어갔다. 커다란 창으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안에는 골프 기어들을 팔고 있는 샵이 있었고, 그곳에서 골프공을 구입할 있었다. 중고 제품마저도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다.

미켈레의 미션이 끝나고, 우리는 이곳에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 분위기에 반에 생각보다 가격은 비싸지 않았다. 분명 엄청나게 적은 양의 음식이 나올 것이라 모두 예상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몽골에 있는 동안 음식의 양으로 실망한 적은 번도 없었다.

2018 7 28

오늘 마지막 재료 구입을 위해 환전을 해야 했다. 뉴질랜드 몽골 영사관에서 뉴질랜드 달러로 가져가지 않기를 권했기에, 나는 모두 미화로 가져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자신이 남겨두었던 싱가포르 달러를 가져가길 권했다. 일반적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싱가포르 달러는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골에서 싱가포르 달러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결국 다음날 겨우 은행을 찾았다.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싱가포르 환전을 해주는 곳을 찾아 헤매느라 이미 지쳐버렸다. 그냥 ATM에서 돈을 뽑았다.

몽골에서 구글맵은 믿기가 어려웠다. 업데이트가 빠르게 되지 않는 같다. 나는 이미 온몸이 비로 젖었고 지쳤다. 시간도 충분치 않았다. 재료 구입을 위해 나란툴 마켓은 비로 인해 길은 모두 빗물로 넘치고 주차장은 차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상황에서 내가 과연 자동차 넘버를 가지고 LAM 360°에서 준비해 운반 차량을 찾을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구입해야 하는 인조잔디는 뉴질랜드와 비교해서 가격이 싸지 않았다. 물가가 대체적으로 편인 일반적인 물가와 비교했을 굉장히 비싼 편이다. 흥정을 시도했지만 되지 않았다. 결곡 15미터로 양을 줄이고 구입했다.  여전히 금액이었다.

직원 명이 인조잔디를 어깨에 메고 운반을 도왔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그가 계속 옆에 있는 상황에서 나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운반 차량을 찾는 것이 너무나도 긴장되고 힘들었다. 얼마나 빗속에서 달리며 찾았는지, 운반 차량을 찾았을 나는 이미 너무 지쳐있었다. 그래도 모든 재료 구입이 마무리되었다.

The Chojin Lama, Ulaanbaatar. Photo by Sena Park

The Chojin Lama, Ulaanbaatar. Photo by Sena Park

2018 7 29

오늘 저녁 LAM 360° 공식 일정이 시작된다. 나는 그전에 시티 한복판에 있다는 쵸진 라마 절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여러 지나다녔던 길임에도, 절이 있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장소였다.  빌딩 숲에 가려 도로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을 다녀온 작가들은 현대와 과거 건축물의 대비가 인상적인 곳이라 입을 모았다. 실제 모습을 역시 느낌을 받았다. 오래된 절의 처마 너머로 보이는 현대적 건물은 푸른 하늘에 더욱더 극대화된 하모니를 연출했다. 쵸진 라마 절은 각각 다른 콘셉트로 만들어진 여러 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일반적인 사각 형태를 벗어나 둥근 형태의 절이 있었는데, 몽골의 전통 가옥게르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전체 사원을 들어가는 입구 앞쪽에는 커다란 벽이 서있었다. 마치 고대의 보물 유적 같은 느낌으로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웨딩 촬영이 한창이었다. 사실 울란바타 시티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같이 웨딩촬영을 보았다. 특히 수흐바타르 광장은 웨딩 포토로 유명한 장소임이 분명했다.

몽골에는 특별한 몽골 룰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몽골리안 타임이라 말한다. 몽골은 정말 넓고 나라다. 대지 위에 사는 사람들은 거대한 자연 앞에 자신은 정말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인간의 하루는 자연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몽골 사람들은 서두르는 법이 없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시간 약속에 있어서도 굉장히 여유롭다. 그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자연이 자연 그대로 흘러가듯 말이다.

아마 내가 여기서 머무는 3 동안, 분명 나는 많은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만나게 것이다. 역시 또한 자연의 흐름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도록 노력 것이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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