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센베노 그리고 하이! 두 번째 이야기_랜드 아트 몽골리아 360º
2018년 7월 30일
오전 10시가 막 넘어가는 시각, 버스 안에서는 파티가 시작되었다. 마치 영화 속에서 나 보았던 옛날 어른들의 관광버스 파티를 연상케 했다. 술잔이 돌아가고, 끝없는 수다가 이어지며 버스 안은 점점 흥이 나기 시작했다. 몇몇 작가들은 벌써 조금 취한듯했다. 술 파티를 시작하기엔 조금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아직은 낯선 분위기를 편하게 해주기에는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자칫 무료해질 수 있었던 긴 여정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보드카로 시작한 술은 맥주에서 와인으로, 앞 좌석에서부터 뒤 좌석으로 건네졌다. 몇몇 작가들은 너무 이른 시간 탓인지, 정중히 술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돌고르는 ‘시간은 시간일 뿐’이라며, 함께 즐기기를 권했다.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우리는 ‘오늘 안에 도착은 하는 거야?’라며, 의문 섞인 농담을 해댔다. 딱히 정해진 타임라인은 없는 듯 보였다. 이게 바로 몽골 스타일이다. ‘시간은 시간일 뿐’. 돌고르의 이 한마디는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간간이 우리가 과연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가는 동안 전혀 지루할 틈은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우리를 실은 버스가 포장도로를 벗어나 거친 벌판으로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버스는 마치 방향을 찾는 듯 계속 돌았다. 드디어 오후 3시, 우리는 랜드 아트 비엔날레를 위한 장소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숙소가 정해졌다. 한 게르에 작가 3명이 함께 사용하게 되는 데, 그때 통역사로 온 아차는 내 이름을 불렀다. 가장 먼저 정해진 방은 상대적으로 작은 게르였고, 캠프의 주인은 이방을 체구가 작은 작가들이 쓰기를 권했다. 그중 내가 가장 먼저, 작은 작가로 선택된 것이다. 뒤이어, 픽시와 리젤이 나와 함께 지내는 멤버가 되었다. 우리의 방은 침대 대신 소파가 놓여 있었다. 리젤은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타이완에서 살고 있었다. 우연하게도, 픽시 역시 남아프리카가 고향이며, 지금은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도 영어의 스트레스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왜? 도대체 왜? 왜? 30명이 넘는 사람들 중에 하필 나는 영어가 모국어인 이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가? 마치 내 인생에서 영어는 영원히 도망칠 수 없는 굴레 같았다. 나는 영어 사전 앱을 사용하기 위해 무제한 인터넷 데이터 팩을 구입해 왔다. 하지만, 이것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이곳에서는 시그널이 잡히지 않았다.
캠프의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바위들이 쌓인 듯 높이 솟은 돌 산이 눈길을 끌었다. 나는 그곳 정상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몽골인들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었고, 그들은 그런 산을 섬겼다. 돌고르는 이 성스러운 산을 오르되, 절대 중앙을 가로질러 오르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러면서, 왼쪽으로 돌아 오른쪽으로 내려오라고 조언했다. 리젤, 소피, 그리고 미켈레와 나 이렇게 4명의 작가들은 정상을 향한 원대한 꿈을 갖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성스러운 산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험했다. 우리는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계획까지 했었지만, 초반부터 만난, 내 머리 위에서 빙빙 날아다니는 독수리는 나를 시작부터 겁먹게 했고, 결국 우리는 험한 산세를 이유로 포기해야 했다. 우리의 산 정복은 아쉽게 끝나버렸다.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 몽골리안 어시스트 큐레이터인 솔롱고가 작업의 시작에 앞서 우리에게 특별한 의식을 부탁했다. 그녀가 말한 의식이란 스푼을 이용해서 신선한 우유를 흩트리며, 이곳을 지켜주는 가장 높은 산(우리가 오르려 했던)을 향해 기도하고, 땅과 하늘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가벼운 드링크와 함께 이곳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2018년 7월31일
어제, 오늘의 아침 식사는 오전 9시쯤 시작될 거라고 했었다. 조용한 아침, 리젤과 나는 누군가가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제 본 듯한 이가 게르 안으로 아침식사를 들고 들어왔다. 놀라 잠이 깬 픽시는 ‘벌써 9시야?”라고 물었다. 그 시각, 오전 7시 40분이 겨우 지나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는 음식이 나오는 시간이 식사 시간이었고, 그 어느 누구도 식사시간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나는 오늘 내 작업 설치를 위한 장소를 3군데 정도 찾아볼 계획을 세웠다. 내가 가장 먼저 마음에 둔 곳은 우리의 캠프에서 자연스럽게 길을 따라 걸어가기 쉬운 바로 앞 언덕 너머 장소였다. 언덕의 끝에 도달했을 때 미국에서 온 작가 리처드와 우리의 통역사 아차가 넓고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명상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 보였다. 최대한 조용히 그들 옆을 지나가려고 하던 그때, 나는 웃음이 나고 말았다. 그들은 명상이 아닌, 이곳에서 핸드폰 수신을 찾고 있었다. 이 넓고 아름다운 대지 한가운데서 말이다. 몽골은 지대가 높을수록 전화, 그리고 인터넷 수신을 받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내 핸드폰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다시 캠프로 돌아와 오른쪽 지역으로 가보기로 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아까 보았던 곳이나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니 지형의 모양, 상태가 또 달랐다. 이쪽은 좀 더 마른 땅과 작은 바위들이 많았고, 높이도 좀 더 높았다. 핸드폰 시그널을 확인해 보니 시그널이 잡혔다.
달콤한 문명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나는 성스로운 높은 돌 산의 뒤쪽 길을 가보기로 했다. 좁고 끝없는 밸리처럼 보였다. 너무나 고요했다. 캠프에서 점점 멀어지니, 밝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요함은 나를 무섭게 만들었다. 지대가 조금씩 높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길의 끝에 다다랐을 때, 내 눈앞에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내가 걸어온 편편한 지대는, 반대편에서는 마치 절벽 위와 같은 높은 지대로, 나는 아래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드넓은 대지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우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이끌려 캠프의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캠프의 주인인 미가가 우리를 위해 특별한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가는 전역한 퇴역군인으로, 이곳을 친환경 캠프로 직접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는 몽골 가수들을 초대했다. 앰프의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전통 음악과 현대 음악을 감상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벤트가 끝나고 미가는 조금은 부끄러워하며 간단한 자기소개를 한 후, 노래 한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흥이 난 미가는 노래 한 곡을 더 부르기 시작했다. 흥겨운 음악에 맞춰 모두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가 몽골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몽골인들은 정말 흥이 많은 민족이란 느낌이 들었다.
저녁 메뉴로는 매콤한 빨간 수프가 준비되었는데 마치 한국의 감자탕을 연상 케 했다. 그때 큐레이터 루이스가 잠시 나의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하길 원했다. 대학원 졸업 이후 특별히 상담을 할 기회가 없었던 나는 갑자기 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다행히 그는 내 작업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내일 작업이 진행될 장소를 함께 체크해 보기로 했다.
저녁 식사 후 언제나처럼 수다가 이어졌다. 소피는 동물인 말과 관련된 문화를 좀 더 알고 싶어 했었는데, 이날 오후 이 지역의 말 사육 가정을 방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피의 가족도 3대째 말과 관련된 일을 했다고 한다. 몽골인과 소피는 다른 환경을 가졌지만, 말이라는 공통 소재로 꽤 흥미로운 대화가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그녀는 오늘 방문한 곳에 대해 이야기해주기 시작했고, 흥에 겨운 나머지 갑자기 불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차가 정중한 말투로 ‘영어로 말해줘’라는 말을 할 때까지 소피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웃고 말았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의 수다는 이어졌다.
2018년 8월 2일
어젯밤은 숙면을 취한 덕에 유난히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브로콜리 수프마저도 너무나 맛있었다.
오늘은 기필코 설치 작업을 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선택한 장소는 큰 돌들이 마치 둥근 모양으로 거실의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놓인 곳이었다. 돌 위에 앉으면, 360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말이다. 자연은 예상할 수 없는 위대한 창조물이다. 나는 이 장소를 어제 물색해 놓았는데, 오늘 본 이곳은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 태양의 밝기 그리고 주변의 공기 이 모든 상태들이 어제와는 조금씩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시작에 앞서 이곳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우유를 얻기 위해 솔롱고에게 부탁하니, 신선한 우유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구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했다. 다행히도 말과 소를 기르고 있는 캠프장의 이웃에게서 조금 얻을 수 있었다.
조금씩 우유를 흩트렸다. 하늘을 향하여, 그리고 멀리 보이는 성스러운 산과 땅을 향하여.
내가 다시 캠프로 돌아왔을 때 나의 룸메이트 리젤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리젤이 작업물을 함께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작업물은 마치 움직이는 작은 움막 같았다. 우리가 작업물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돌고르는 바퀴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바퀴를 더욱 튼튼히 고정시키길 권했다. 아무래도 길이 험하기 때문에 비엔날레의 책임자로써 돌고르는 작가의 안전을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다. 리젤의 프로젝트는 그녀가 만든 현대식 장비를 갖춘 야영 기구와 함께 2~3일간 직접 야외 유목민 생활을 체험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첫날부터 돌고르는 그녀의 프로젝트에 대해 살짝 걱정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여전히 아직도 많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큐레이터 루이스가 나의 작업 장소에서 커다란 뱀을 두 마리나 보았다며, 사진을 보여줬다. 그와 솔롱고는 뱀은 행운을 상징한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오전에 그들에게 바친 우유 의식에 대한 화답이었을 거라 우리는 생각했다.
나의 이번 작품 ‘visitation’은 광대한 몽골에서 외국인, 또는 관광객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편안한 장소를 표현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준비하기 앞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내가 새로운 곳에서 그들의 문화를 얼마만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자연에 둘러싸인 환경에서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도시의 생활방식과 사회생활에 대한 나의 생각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먼저, 나는 나무 기둥을 세우기 시작했다. 세로로 긴 나무 기둥은 가로로 넓게 펼쳐진 자연에 반하는 현대 식 건축물을 상징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두 기둥은 내 공간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역할도 하게 된다. 땅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딱딱했다. 일단 하나의 기둥만 세워 두기로 했다.
그다음, 인조 잔디로 바닥을 덮을 차례이다. 뉴질랜드 제품보다 몽골의 인조잔디는 좀 더 무거운 느낌이었다. 바닥이 단단한 고무로 마감되어 있었다. 큐레이터 팀, 루이스와 솔롱고가 내 작업의 진행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왔다. 그리고는 입구 기둥을 어디에 세울 것인지 먼저 물었다. 나는 미리 세워둔 기둥을 가리켰다. 순간 솔롱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몽골은 현재의 실생활에서도 여전히 강하기 지켜 내려오는 옛 관습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집 입구는 반드시 북쪽을 향해야 한다. 그래야 나쁜 기운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그에 반해 나의 입구는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정한 입구는 내 나름대로의 현대식 가옥 구조에 대한 해석으로 정해진 것이긴 했지만, 굳이 그것이 미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거스를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바로 문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저녁 6시쯤 캠프로 돌아오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점점 세지기 시작했다. 미가가 급히 차를 몰고 어디론가 떠났다. 이곳에서 우리는 작업 장소에 대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원하는 장소라면 어디에서 든지 작업을 할 수 있다. 몇몇 작가들은 캠프에서 멀리 떨어진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업을 하기도 한다. 미가는 그의 밴을 타고, 모두가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조금 후, 리젤이 밴에서 내렸다. 비가 점점 세지면서, 그녀는 작업물은 남겨둔 채 자신만 밴을 타고 캠프로 돌아온 것이다. 비가 다시 멈추는 듯했고,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다.
갑자기 비가 엄청난 바람과 함께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태풍을 본 적이 없었다. 시티에서 보던 폭우와는 달랐다.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자연의 경이로운 공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건물은 친환경 건물이다 보니 건물 안조차 안전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떠한 시야의 막힘도 없이, 저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태풍의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보였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새로운 차원의 공포였다.
비는 더욱더 거세졌고, 우리가 머물고 있던 건물 안에도 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급하게 중요한 물품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순간 이곳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스태프들이 인원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기상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리젤이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비가 조금 잠잠해졌을 사이 밖에 두고 온 작업물은 확인하기 위해 다시 나갔던 것이다. 그녀는 소피가 아직 밖에 있다고 소리쳤다. 미가와 몇몇 작가들이 소피를 찾으러 급하게 출발했다. 길은 이미 사라졌고 곳곳에 웅덩이가 파이기 시작했다. 얼마 뒤 소피를 찾지 못한 채 밴이 돌아왔다. 스태프들은 무언가를 상의하는 듯했고, 다시 소피를 찾으러 출발했다. 캠프 안이 물과 진흙으로 가득했다. 어떤 게르는 난로의 연소 통이 무너지며, 물이 한꺼번에 게르 안으로 쏟아졌다. 잠시 후 소피는 무사히 돌아왔다. 그녀는 동물을 위해 마련된 작은 움막에 몸을 피해 있었다고 한다. 혼자 그곳에 있기에도 두려웠던 그녀였지만, 길이 너무 멀고 위험해 보여 이곳으로 걸어올 수가 없었다고 했다.
거센 비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비가 그치고, 나는 모든 것이 괜찮은지 확인했다. 우리의 게르 방 역시 진흙이 잔뜩 밀려 들어와 있었다. 다행히 그 외에 이상은 없어 보였다. 단지 나는 오늘 새로 오픈한 나의 인조 잔디와 조화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분명 조화들은 이미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확인할 수 없었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고, 야생동물들의 활동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2018년8월 3일
화장실이 상태가 좋지 않을 상태에서 왜 이렇게 매일 밤 화장실이 더 가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어젯밤도 잠을 잘 잘 수가 없었고, 동이 트자마자 화장실로 갔다.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가 근처 타운으로 나간다기에 함께 가기로 했다. 나는 잠시나마 이곳을 떠난다는 게 기뻤다.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도시의 문명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되었다. 타운에 가까워지자 함께 있던 이들의 전화기의 알림 기능이 하나둘씩 울리기 시작했다.
타운에 가까워질 때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바다의 부인, 주르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오늘의 나들이는 그녀를 픽업하기 위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잠시 후 우리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에 도착했다. 우리는 먼저 없는 게 없어 보이는 물류 상점에 들렸다. 그리고 식품점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도 한국 음식을 팔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몽골에서 유명하다는 보드카 한 병을 샀다. 우리가 캠프로 돌아갔을 때, 미가가 오늘 특별히 ‘칭기스 시티’투어를 해주겠다고 했다. 바로 우리가 방금 다녀온 곳이다. 그래서 투어에 합류하지 않고 대신 나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지난밤의 사나웠던 날씨 속에서 나의 조화들이 날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내 주변의 돌들에 색깔을 입혀주고 싶었다. 화학재료를 자연에 직접 쓸 수 없기 때문에 대신 나는 나란툴 시장에서 색 파우더를 구입해왔다. 한정된 색만 구입할 수 있었지만, 몽골의 전통 방법으로 색을 입힌다는 자체에 의미를 두고 즐기기로 했다. 파우더에 물을 붓고, 소금을 넣어 모든 것이 잘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나는 색이 만들어진 물을 바위에 붓고 마르길 기다렸다. 색들은 화학 안료처럼 진하고 선명한 색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바위 안으로 색이 스며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색이 만들어졌지만, 자연과 대조되는 강렬한 인조적 느낌은 없었다. 마치 원래 있던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다. 대신 무늬를 그려 넣어 보았다. 대자연 속에서의 작업은 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늦은 저녁, 나는 몽골 아티스트들의 게르안 파티에 참석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몽골 작가와 외국인 작가들이 게르안에 가득 모여있었다. 우리는 둥글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계방향으로 보드카 잔이 돌려졌다. 몽골 작가 오드마가 보드카 잔을 책임졌다. 그녀는 아주 적은 양의 보드카를 머그잔에 부었다. 머그잔 안에 따라진 보드카를 모두 마실 필요는 없다. 각자가 마실 수 있는 양만 마시면 되고, 마실 수 없다면, 입술만 살짝 적셔도 된다. 잔을 거부하는 행동은 무례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파티가 계속되는 동안, 어느 누구도 잔을 거절하지 않았다. 몽골은 하나의 컵으로 술을 함께 돌려 마신다. 한국도 비슷한 술 문화가 있지만, 보통 나는 거절하는 편이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몽골의 룰을 따르기로 했다. 이러한 관습은 아주 오래전 옛날, 적의 독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관습이라고 했다. 그 시작은 유쾌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현재에 와서 이 관습은 술자리를 더욱 흥겹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술 문화로 자리 잡았다. 잔을 비우고 나는 내가 마신 잔을 게르의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중앙의 두 기둥 사이로 건네려 했다. 그 행동을 지켜보던 작가들은 놀라 나의 행동을 막았다. 몽골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이 나무 기둥 사이로 건네서는 안된다고 했다.
오드마는 정말 적은 양의 보드카를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잔을 마시고 나니, 나는 조금씩 취하고 있었다. 매우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고, 몇몇 작가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파티를 계속 즐기고 싶은 아쉬운 작가들은 장소를 옮겨 이어갔다. 이날의 보드카 파티는 내가 몽골에서 즐긴 처음이자 마지막 보드카 파티였다.
2018년 8월 4일
내가 눈을 떴을 때 나의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한국 음식이 너무 간절했다. 몽골 작가 바다는 그런 내 마음을 읽고선 그가 가지고 있던 인스턴트 컵라면을 이용해서 한국식 김치찌개를 요리해 내게 가져다주었다. 외국인이 만들어준, 타국에서의 한국 음식에 나는 너무 감사했다. 아니 감사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고마웠다.
2018년 8월 5일
나중에서야 알았다. 내가 작업하는 장소가 늦은 오후 소들의 마실 장소라는 사실을. 매일 아침마다 나는 소들의 배설물과 함께 어지럽혀진 장소를 치워야 했다. 목격자에 따르면, 소들은 내가 세워둔 나무 기둥을 머리로 들이박아 쓰러뜨려 놓는다고 한다. 아침마다 쓰러져 있는 기둥에 대한 미스터리가 풀렸다. 나는 오늘 몽골의 전통 스카프 ‘하닥’을 꿰매어 가장 큰 둥근 바위를 덮어 씌울 계획이다. 하닥은 실크처럼 가볍고 부드러우며. 보통 노랑, 연두, 파랑, 빨강 그리고 흰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닥’은 누군가에게 존경을 표할 때 사용되는데, 양손 바닥에 하닥을 올리고 양팔을 올려 들어, 경의를 표한다고 한다. 그리고,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풍습으로 하닥을 돌이나 나무에 묶음으로서, 그 자연물은 신성한 것으로 재 탄생되기도 한다. 나는 이 아이디어를 내 작업에 적용하고 싶었다. 큰 바위를 하닥으로 감싸 덮음으로서 단조로운 자연에 반하는 인위적인 선명한 색을 입혀 줌과 동시에 또 하닥을 이용하여, 이 장소를 성스러운 장소로 탈바꿈 시키는 그들의 문화도 받아들이는 매개체로 사용하고 싶었다. 보통은 하닥을 사물에 묶어 놓는다. 대신 나는 바느질을 사용하였다. 바람이 세고, 바위의 모양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바느질이 쉽지는 않았다. 나는 하닥 스카프를 하나하나 차례로 꿰매어 엮고, 바위의 모양에 따라 바느질을 해나갔다. 중간중간 매듭을 지어 묶기도 했다.
저 너머 근처에 작가들이 무리 지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몽골 작가 바다의 작품 사진을 찍는 모양이었다. 바다의 작품은 사이즈가 각기 다른 여러 개의 거울을 약간씩 다른 각도로 세워 놓은 작품이다. 모여든 작가들은, 다른 인종, 다른 성별 그리고 다른 국적으로, 그들은 가느다랗고 긴 스카프로 눈이 가려진 채 그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기엔 동물인 말도 동원되었다. 눈을 가리기 위해 사용된 긴 스카프의 끝은 또 다른 이의 스카프의 끝과 묶여졌다. 불규칙적인 스카프의 묶음으로 우리는 모두 한데 뒤엉켜 연결됐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오브젝트가 되었다. 우리의 자세는 앞에 놓인 거울에 제각각 비쳤다. 바다는 우리에게 원하는 자세를 주문했는데, 먼저 몽골어로, 다음은 영어로 통역되었다. 우리는 모두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몸동작을 서로 볼 수 없었고, 오직 귀로 전달되는 번역된 다음 주문에 집중하고 있었다. 작가는 이 시간 동안 보이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생각에 집중하는 기회가 되길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는 여전히 제2외국어인 영어로 된 주문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이를 통해, 작가와 관객 사이의 서로 다른 이해에 따른 해석과 받아들임의 차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 작업의 아이디어는 사람이 손길이 닿지 않는 한 번도 가본적 없는 곳에 대한 판타지로부터 시작되었다. 때묻지 않았을 순수한 자연과 몽골인의 라이프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분명 도시의 생활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것도 예상했다. 나는 도시의 문화를 대표함에 있어서 밤 문화를 표현해 쓰고 싶었다. 리서치 과정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밤 시간대를 즐기기 위해 스피커와 디스코 라이트를 준비해 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작은 미러볼과 형광 스틱, 그리고 반짝거리는 소형 디스코 라이트를 준비했다. 많은 작가들이 이미 이곳에서의 전기 사용을 고려해 태양열 장비들을 준비해 왔다. 그에 반해 나는 모두 배터리로 작동이 되는 아이템들로 준비해 왔다. 설치 작업이 끝나고 나는 내가 준비한 밤 문화의 소품들을 작동 시켜 보았지만, 생각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도시의 닫힌 공간에서 실험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효과였다. 실패했다는 생각에 나는 솔직히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내 작업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문화가 스며들어갈 수 있는 지도 생각해 보고 싶었다. 아마도, 그 문화라는 것은 충분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받아들여져, 변형되고 어쩌면 본질적인 의미에서 벗어난,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나는 사람들과의 교류 역시 갈망할 것이다. 나는 와인과 잔을 준비해 두었다. 내가 만들어낸 이 장소는 사방이 딱 트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이 맑아졌다. 나는 나의 가짜 뱀 인형들이 또다시 행운을 가져온 것이라 믿었다. 큐레이터팀과 사진작가가 도착하고, 다른 작가들도 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은 내 작품 안으로 들어와 와인을 함께 했다. 내가 의도했던 것처럼, 그들은 작품안에서 작품을 그대로 즐기고 있었다.
밤 문화를 표현은 역시 잘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실패 역시 몽골에 대한 나의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작업이 모두 마무리되고, 나는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내 작품을 보고 분명 한국인 작가의 작업일 것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거의 모든 재료를 몽골 현지에서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전통 색에 있어 나 역시 한국과 굉장히 유사함을 느끼긴 했었다. 아마 한국과 몽골이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이미 몇 작가들에게서 내 작업의 아이디어가 한국의 문화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상태였다. 사실 이번 작업에서 내가 한국의 문화를 드러내려 한 의도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미 많은 이들이 내 작품에서 한국의 문화를 읽어내고 있었다. 특히 한국인 방문객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넘어선 반응을 보였다. 그는 내가 표현한 모든 것 하나하나를 한국의 것에 빗대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 작업이 한국 문화에 기반하여 만들어졌다고 확신한 듯했다. 물론 나는 나의 한국인으로서의 배경을 숨길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어떤 관객의 입장에 있어서는 나의 태생적 문화 배경이 내 작품을 이해하는데 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몽골의 문화가 외국인의 관점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재해석되는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었다. 나는 이번 작업을 통해 새롭게 배운 것이 있다. 한국인이라는 태생적 배경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뉴질랜드에서 보다 다른 나라에서 더 강하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별이 빛나는 밤, 또 하루가 지나고 있다.
작업이 끝나고 남은 날들을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보냈다. 이렇게 나의 첫 레시던시는 많은 것들을 배우게 해 주는 동시에, 조금은 힘들었고, 또 내가 아직은 갈 길이 멀었음을 깨닫게 해 주는 시간이 되었다.
10일간 힌티에서의 레지던스가 끝났다. 이른 아침, 우리는 캠프의 주인 미가와 그의 가족들에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단체사진을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 이곳으로 오는 길은 참 멀게 느껴졌었는데. 하지만, 돌아가는 길은 굉장히 가까웠다.
도시로 돌아온 것이 너무 행복했다. 울란바타르에 도착한 우리는 아직 마지막 행사를 남겨두고 있다. 바로 몽골 국립 현대 갤러리에서의 전시이다. 몇몇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 일부분을 전시장에 전시해야 했다. 나머지 작가들에게는 2일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그날 저녁, 8명의 작가들이 저녁을 함께하기 위해 모였다. 몇몇 작가들이 한국 음식을 먹길 원했다. 대부분이 유럽 작가들이라 양식을 먹을 것이란 내 예상이 빗나갔다. 어쨌든 나에겐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만 말이다. 아는 음식점은 없었지만 그냥 내 감을 믿고 그들을 리드했다. 괜찮아 보이는 한국 음식점을 찾아 들어간 그 음식점 안에는 다른 작가들과 큐레이터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도시로 돌아와 모두가 선택한 첫 메뉴가 한국 음식이라는 게, 왠지 뭉클한,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한국 음식이 외국에서 이렇게나 인기인가? 요즘 케이팝의 열풍으로 한국이 많이 알려졌다는 소식은 나도 들은 바가 있지만, 나는 젊은 세대에 국한되어 있는 줄 알았다. 우리 그룹 중에 2명의 작가는 채식주의자였다. 나는 그중에서 비교적 고기의 양이 적어 쉽게 덜어낼 수 있는 메뉴를 권했다. 하지만, 준비되 나온 음식 안에 가득한 고기 양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여기가 몽골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몽골인의 고기 사랑을. 내가 채식주의자를 위해 권했던 음식은 고기가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고기를 덜어낸 그들은 다행히도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사실, 다른 작가들의 음식도 내가 설명한 것과 다른 비주얼에 조금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제서야 내가 상상했던 한국 음식이 한국 내에서의 한국 음식이 아닌 뉴질랜드에서 먹던 한국 음식임을 자각했다. 한국에서 먹던 한국 음식을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왠지 어설펐던 내 가이드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외국인들은 한국 음식 하면, 전형적으로 김치를 떠올리는 듯하다. 그리고, 김치는 식사에서 항상 빠져서는 안되는 반찬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김치도 취향에 따라 굉장히 선호도가 다르고, 나 역시 김치를 그렇게 찾는 스타일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놀랍게도, 유럽 작가들은 김치를 마치 에피타이져 마냥 깨끗이 끝내고 주문을 반복했다. 심지어 그들은 내게 막걸리를 주문해 주길 부탁했다. 나는 막걸리를 먼저 요구하는 외국인을 처음 보았다.
2018년 8월 10일– 랜드 아트 몽골리아360o 의 마지막 날
오후 4시, 우리는 전시 오프닝을 위해 전시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여전히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프닝이 시작되고, 방송국에서 행사를 촬영하기 위해 나왔다. 몇몇 주요 인사들의 짧은 스피치가 이어졌다. 이렇게 드디어 제5회 랜드 아트 몽골리아의 행사가 모두 끝났다. 이 모든 게 소중한 추억이 되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 스스로에게 실망도 많이 했지만 말이다. 분명, 다음을 위해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을 거라 믿는다. 다 함께 단체 사진도 찍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행사는 2시간가량 진행되었고, 우리는 모두 호텔의 루프탑 바에서 뒤풀이를 위해 모였다. 맛있는 음식과 술이 함께 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작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아쉬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 어떤 작가들은 이미 이런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져 있으리라. 처음으로 이곳을 떠나는 작가는 타이완 작가 밍이었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에 그를 붙잡고, 연신 사진을 찍어댔고, 그는 한동안 떠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하나둘씩 작가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작가들은 몽골의 밤 문화를 체험해 보기 위해 클럽으로 향했다.
모두가 음악에 맞춰 이 시간을 즐겼다. 우리가 찾아간 클럽은 ‘서울 거리’라는 한국의 수도 이름을 빌려 만든 거리에 있었다. 서울의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거리의 양쪽으로 푸드 트럭이 줄지어 있었고, 도로 한가운데는 테이블과 의자로 채워져 있었다. 물론 차의 진입은 통제가 된 상태였다. 우리는 이곳의 일반적인 가격과 다른 밤 문화의 높은 물가에 조금 놀랐다. 우리는 수중에 가지고 있던 현금을 거의 다 쓴 터라 남은 돈을 한데 모아 음식을 사서 나눠먹었다. 시간이 지나자 4명의 외국인 작가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 와중에 몽골 작가들은 모두 함께 우리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밤을 마무리해 줄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시간이 너무 늦은 탓에 장소를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갑자기 몽골 작가들이 우리를 택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는 도대체 우리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들을 따랐다. 점점 시내에서 멀어지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는 원하는 손님들을 태워 늦은 시간까지도 영업을 하는 곳으로 알아서 데려다주는 영업택시를 탄 것이었다. 우리는 택시를 이용한 후에도 택시비를 지불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영업장 주인으로부터 직접 요금을 받는다고 했다.
우리는 둥근 커다란 경기장 같은 건물이 서있는 어두운 장소에 도착했다. ‘울란바타르 궁전’이란 네온 사인이 보였다. 우리는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깊게 안쪽까지 걸어 들어가니, 정말 나이트클럽이 나왔다. 마치 넓은 콘서트 장 같은 70~80년대에 있었을 법한 디스코장이 생각나는 장소였다. 천정의 중앙에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거대한 미러볼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현란한 색들로 미러볼이 반짝였다. 귀에 익숙한 팝 뮤직이 흐르고 있었다. 음악이 플레이 되는 중간중간 디제이의 멘트가 섞였다. 마치 옛날 영화 속 떡볶이집 디제이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가 무대에서 여전히 흠뻑 취해있을 동안 몽골 작가들은 하나둘씩 피곤함에 지쳐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돌아가는 이 없이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해 주었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거의 영업이 끝나는 분위기가 되고, 디제이가 무언가를 계속 이야기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몇 가지 단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랜드 아트 아티스트. 나중에 물어보니, 몽골 작가들이 마지막 인사를 디제이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랜드 아트 몽골리아에 참석한 외국 작가들을 위한 감사 인사말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밤을 만들어 주었다.
2018년 8월 11일
울란바타르에서 나의 룸메이트였던 일본인 작가 사토코가 이른 아침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조식을 먹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니 아직 많은 작가들이 호텔에 남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어제저녁 사실상 작별 인사와 포옹을 이미 했지만, 다시 아침을 먹으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모든 짐을 챙겨 12시 체크아웃을 하기 위해 로비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우리는 또다시 작별의 인사와 포옹을 했다.
내일 나는 고비 투어를 시작한다. 오늘 하루 더 울란바타르에서 머물러야 한다. 나는 아직 몽골에 남아있는 작가들과 마지막 저녁을 함께 하기 위해 만났다. 개성 강한 작가들이기에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저녁이 끝나고 우리는 또다시 작별의 시간을 가졌다. 반복되는 작별 인사에 누군가가 다음번엔 행사가 끝나면 제일 먼저 떠나는 일정으로 만들겠다며 반복되는 지친 작별 인사에 모두 웃고 말았다. 정말 이제 진짜 마지막 인사이다. 언젠가 다시 그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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